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every little step

작업노트 점점 넓어져만 가는 것과는 반대로 한가로이 걸을만한 곳도 눈을 둘만한 곳도 차차 사라져 가는 홍대라는 애매한 이름의 지역에 정이 거두워질 즈음 내 마음을 이끈 곳은 낙산 성곽길 아래 제비 둥지처럼 가부좌 튼 장수마을이라 불리는 한 작은 마을이었다. 이곳엔 생각 없이 다닐 수 있는 길이, 멍한 시선을 담아줄 허공이, 뜻 없이 내뱉는 한숨에 귀 기울이는 평상이 있었다.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미래라고, 혹은 노스탤지어라고 부르는 것들이 일상의 겹을 두르고 세상사와 무관한 듯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. 세상의 속도보다 몇 발자국 뒤쳐진 곳에서 나는 걷고 싶었다. 넓게 뻗은 길이 아닌 오솔길을 소요하듯 걷고 싶었다. 남들의 눈엔 잘 보이지도 않을 작은 길이라도 내 발로 내고 싶었다. 그리고 그 바람을 ..
작업노트

점점 넓어져만 가는 것과는 반대로 한가로이 걸을만한 곳도 눈을 둘만한 곳도 차차 사라져 가는 홍대라는 애매한 이름의 지역에 정이 거두워질 즈음 내 마음을 이끈 곳은 낙산 성곽길 아래 제비 둥지처럼 가부좌 튼 장수마을이라 불리는 한 작은 마을이었다. 이곳엔 생각 없이 다닐 수 있는 길이, 멍한 시선을 담아줄 허공이, 뜻 없이 내뱉는 한숨에 귀 기울이는 평상이 있었다.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미래라고, 혹은 노스탤지어라고 부르는 것들이 일상의 겹을 두르고 세상사와 무관한 듯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.

세상의 속도보다 몇 발자국 뒤쳐진 곳에서 나는 걷고 싶었다. 넓게 뻗은 길이 아닌 오솔길을 소요하듯 걷고 싶었다. 남들의 눈엔 잘 보이지도 않을 작은 길이라도 내 발로 내고 싶었다. 그리고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가을의 문턱을 지난 어느 하늘 깊은 날, 근 십 년의 추억과 이삿짐을 1톤 트럭에 함께 싣고 등지듯 홍대를 떠나 이곳으로 왔다.

이사를 온 후부터 카메라를 들고 낙산 구석구석을 다니기 시작했다. 셔터를 참 많이도 눌렀다. 하지만 그만큼 많이도 버렸다. 이 동네를 별세계로 바라보는 외부자의 시선이 스스로 못마땅했던 것이다. 그리고 특정한 공간이 아닌, 귀 기울여야만 가까스로 들려오는, 메아리처럼 은은하게 퍼지는 나를 둘러싼 자그마한 이야기들을,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시간들을 바라보았다. 그제서야 이미지들이 내게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.

그렇게 일 년이 다 되어간다. 사진기를 내려놓아야 촬영이 이루어지는 역설이 어떻게 이미지에 숨겨지고 드러나는지 다 알 수 없어 두려운 마음 앞서지만, 감사하다. 내가, 그리고 나와 함께 호흡해 준 이들과 더불어 쌓은 시간의 흔적이 이미지가 되어 누군가의 망막에 맺히고 마음에 새겨진다는 사실에.

단지 일 년이 지났을 뿐이다. 이음새 없는 세월의 흐름이 다가올 나날들을 무심히 엮어줄 것이다. 그리고 나는 여전히 여기에서, 어쩌면 저기에서 그저 흘러가는 시간들의 잔상을 지속시키기 위해 허허로이 내 작은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.
박정훈
대학에서 국문학을,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.
2007년 첫 개인전 <검은 빛>을 시작으로 <오래된 습관>,
<먼 산>, <시절들>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.
기타리스트로서도 활동하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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